저녁이 있는 자리
하늘의 눈동자를 붉게 물들여 황昏의 막이 내리고, 어둠과 빛이 끊임없이 바뀌는 시간, 저녁. 이는 하루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특별한 시간으로, 시인 홍계숙은 자신의 작품에서 저녁을 절묘하게 묘사하며 그 독특한 매력을 담아냈다.
시적 묘사의 걸작
“이슬에 젖은 무릎으로 저녁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 자리에 앉아있지”
이 한 줄만으로도 저녁의 고요하고 기다림에 찬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슬에 젖은 무릎은 저녁의 길고 지루한 시간을 시사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은 그 시간의 무게감과 외로움을 강조한다.
“짧은 봄볕의 꼬리까지 저금해 둔 나무들은 여름을 인출해 넉넉하게 그늘을 깔아두었지”
저녁이 저물면서 나무들은 낮 동안 저장해 둔 햇살을 사용하여 그늘을 만든다. 이러한 은유적인 표현을 통해 시인은 나무의 끈기와 삶의 순환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소멸되고 태어나는 빛과 어둠의 지루한 릴레이”
낮과 밤의 교체는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시인은 이를 “지루한 릴레이”로 비유하며, 시간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인간의 삶의 유한성을 강조한다.
시간의 경계선
“그렇게 낮과 밤을 절반씩 나눠 가지며 하루는 경계선을 넘어가고 알람을 켜고 끄며 우리도 조금씩 시들어가지”
하루와 밤의 경계선은 또한 생명과 죽음의 경계선이기도 하다. 저녁은 이러한 경계선에 서 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삶도 서서히 저물러 간다.
“천년처럼 길고 하루처럼 짧은 시간을”
저녁은 시간의 복잡성을 상징한다. 어떤 때는 천년처럼 길고 지루할 수도 있지만, 다른 때는 하루처럼 짧고 빠르게 지나갈 수도 있다. 이러한 대비는 시간의 상대적인 본질을 강조한다.
삶의 여정
“목에 걸고 숲에서 걸어 나와 마을을 어슬렁거리는 퉁퉁 부은 저녁의 발등들”
저녁은 끊임없이 숲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숲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끊임없는 움직임은 삶의 여정을 상징한다. 우리는 모두 삶의 길을 걸으며, 그 길에는 때로는 어려움과 고통이 따른다.
“사람보다 질긴 나무는 교대식을 마친 밤의 옷자락을 나뭇가지에 걸어두지”
나무는 저녁과 대조적으로 삶의 끈기를 상징한다. 하루가 끝나면 나무는 밤의 어둠을 옷자락처럼 입고 잠에 든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빛을 맞으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한 그루 나무를 붙잡고 나이테를 새기고 계절을 돌아 나온 쓸쓸한 저녁의 낯빛들”
저녁은 또한 과거의 시간과 경험을 기억한다. 나무에 새겨진 나이테는 저녁이 지난 시간의 흔적이다. 계절이 돌아오면서 저녁은 과거의 쓸쓸함을 다시 한 번 경험한다.
저녁의 의미
“아름드리 회화나무 그늘에는 밤이 오기 전 돌아가야 할 저녁이 늘 거기에 앉아있지”
홍계숙 시인은 아름드리 회화나무 그림자 속에 앉아 있는 저녁을 묘사한다. 이 저녁은 밤이 오기 전에 돌아가야 하지만, 항상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이는 저녁이 시간의 흐름에 묶여 있음을 시사하며, 우리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저녁은 시작이자 끝이다. 하루의 끝이자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다. 저녁은 시간의 경계선에 서서 우리 삶의 여정을 상기시키며, 과거의 흔적과 미래의 가능성을 모두 포용한다. 홍계숙 시인의 걸작을 통해 우리는 저녁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