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와 기러기 김순옥
결빙 풀리는 갈대 좌표 위에
기억기억 한편의 동안거 학습을 저장하고
기러기는 떠나가요
다시 돌아오겠다고 기약하며
지난 가을
기러기 일족들은 멋있는 V자 편대로 도래했어요
천신만고 천로역정 끝에
하지만 마른 갈대숲을 섶 삼아
곤고한 일신을 의탁했을 때에는요
갈대는 줄 것도 남은 것도 하다못해
그 노을에 물드는
찰란한 슬픔의 눈물조차
말라버린 상태였는데요
불 각 중에
영락없이 애처로운 조손 가정의
할미가 되어버렸어요
허옇게 삭은 관절 밑에서
존재만으로도 울이 된다는 듯
무릎을 파고드는 것들과 부대끼며
갈대는 다시 사명을 일으켰어요
태초에 인류를 품어냈던 신화의 동굴처럼
누구를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겠어요
혹한의 밤은 쩡쩡 강물이 울면서
급박한 동결로 압박해 오고
살아 남아야 한다는 절박으로
갈대는 남은 수족 사력을 다해
가엾은 유민들을 품었어요
거센 북풍 앞에 숨죽이며
이생과 저생은 서로가 서로에게
더 단단히 결속되고
애틋한 동병상련으로 녹아들었어요
끈끈한 핏줄처럼
이제 기러기는 떠나가요
북반구 하안거 마치면
다시 돌아오겠다며……
그러나
설령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갈대는 흐뭇하게 말할 수 있어요
뜨겁게 나누었던 경전이 있었다고